요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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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정마을 전경 (아침)


자막-1884년 (고종 20년) 

아름다운 풍광의 마을이 보이고, 염불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오며...

마을 일각에 짚으로 지붕을 얹고, 흙벽에 사방에 창이 난 도살장이 보인다. 


중E:하늘나라에 곡식은 많으리라. 땀 흘려 애쓴 고역 하늘에서 쉼이 있으리. 열반 곡창이 태자의 것이 되니, 억만년 살고지고 태자 만강하리로다. 관세음보살 하감하소서. 나무 아미미타불. 


2. 도살장 안 (아침)


피가 곳곳에 말라붙은 도살장 안. 

목탁을 치며 염불하는 중 옆에 망치를 들고 선 황정, 휘장으로 가려진 문을 보고...

뒤에 백태가 낀 늙은 백정(백정의 수장) 외 백정 몇 명...

천장으로부터 여러 종류의 밧줄과 쇠사슬, 갈고리 등이 늘어져 흔들리고...


백정들E:어사 납시오! 


동문 휘장이 열리며, 백정이 소를 끌고 들어온다.

그 뒤로 입실하기 시작하는 백정들, 제각기 엄숙한 표정들이다. 입실 후 문 잠그고.

백정1, 소등에 붉은 보자기를 확 펼쳐 덮고는, 머리에 눈가리개를 씌운다. 


늙은 백정:꽃씨를 뿌려라. 


도살장 안에 정화수를 뿌리기 시작하는 두어 명의 백정들. 

다른 백정들은 소의 발을 묶는데, 음메... 하고 소가 울자 다시 시작되는 염불...


3. 도살장 밖 (아침)


포졸 하나가 창가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고,

포졸의 시선으로 예닐곱 정도 되는 백정들 사이에 망치를 치켜든 황정이 보인다. 

황정이 망치로 소정수리를 내리꽂으면, 소가 쿵하고 쓰러진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포졸, 침을 꿀꺽 삼키는데...

그 뒤로 정포교와 포졸들 몇이 몸을 숨긴 채 있다. 

창가를 바라보던 포졸이 정포교에게 눈짓을 보내면

정포교, 손짓으로 사인을 보내고 매복해 있던 포졸들 일사천리로 모습을 드러낸다. 


4. 도살장 밖, 다른 일각 (아침)


정포교의 진두지휘 하에 포졸들이 도살장의 각각 다른 문(동문, 서문, 쪽문 등)쪽으로 일사분란하게 이동한다.


5. 도살장 안 (아침) 


황정, 칼이 든 함을 열어 헝겊에 싸인 칼을 꺼내 왼손에 들고 돌아선다.

황정, 앉아서 소의 목을 따려는 순간, 문짝을 걷어차는 소리와 함께 문짝들이 일제히 부서지고 포졸들이 들이닥친다.

소리에 놀란 중, 염불을 멈추고, 백정들 술렁이는데... 

당황한 황정, 일어서는데 칼날이 소목에 달린 워낭의 고리에 끼어 빠진다.

손잡이에서 빠진 칼날이 슬로우로 떨어져 돌바닥에 쨍그랑 튕기고...

황정,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지고, 늙은 백정도 떨어진 칼을 보고 놀라는데...

정포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여유 있게 들어온다. 


정포교:쥐새끼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라! 


포졸들, 닥치는 대로 육모 방망이를 사정없이 휘둘러 매타작을 하고, 

황정, 늙은 백정 등 반항하지 않고 머리를 감싸며 폭력을 받아들인다. 

정포교, 비릿한 냄새에 미간을 찌푸린 채 안을 둘러보는데...


6. 도살장 밖 (아침)


얻어터진 백정들이 하나 둘 끌려나와 무릎이 꿇려진다. 

마지막으로 황정이 끌려나와 무릎을 꿇려지면...


정포교:(둘러보며) 다들 손 내밀어봐. 

백정들:...?

정포교:내 말 안 들려? 손 내밀란 말이야! 


황정을 비롯한 백정들, 제각각 손바닥으로 내밀거나 손등으로 내미는데...

정포교, 끝에 가죽이 달린 등채로 위생검사 하듯 백정들의 손을 툭툭 치며 살핀다. 

마지막 황정까지 손을 살피고 나면 낭패인데... 


정포교:(둘러보며) 육손이 어딨어? 손가락 여섯 개인 놈!


황정을 비롯한 백정들, 의아해 하는데...


늙은백정:그 놈은 어인 일로 찾으십니까요?

정포교:어인 일? 그걸 몰라서 묻는단 말이냐? 그 육손인가 칠손인가가 국법으로 엄히 금한 밀도살을 했단 말이다!

일동:(표정이 굳어지고) ...!

늙은백정:나으리, 그 놈은 백정의 업을 저버려 쇤네들한테서 내쳐진지 오래이옵니다. 

황정:맞습니다요. 그런 놈과 쇤네들이 얼굴 맞대고 살 리가 없지 않습니까요? (기분 나쁘다는 듯) 여기서 그 놈을 찾지 말아주십시오! (정포교에게 퍽, 맞고 뒤로 쓰러지고) 

정포교:이놈들이 몽둥이 맛을 아직 덜 본 모양이다. 얘들아! 

포졸들:예!

정포교:이것들이 고분고분해질 때까지 맛 좀 보여줘라. 


포졸들, 백정들에게 사정없이 몽둥이질을 하는데....


늙은백정:(맞으며) 나으리! 나으리! 

정포교:(손을 들어 제지하면) 

늙은백정:밀도살은 쇤네들에겐 살인이나 한 가지이옵니다. 육손이는 이를 어기고 사사로이 도살하였으니, 나으리들이 아니더라도, 쇤네들 손에 죽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요. 일이 그러한데 육손이를 감춘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하오니, 제발... 매를 거둬 주십시오. 

정포교:(탐탁지 않지만 황정과 백정들을 둘러보며 수긍하는 듯) ...


7. 도살장 안 (아침)


황정, 늙은 백정을 부축해 들어오면 아수라장이 된 도살장 안.

어느새 소가 정신을 차려 발이 묶인 채 꿈틀거리고 있다. 

황정, 아까 떨어진 칼날을 발견하고 주우려고 하는데...


늙은백정:아서!

황정:(멈칫하곤)...

늙은백정:칼에 잡귀가 들었다. (붉은 보자기로 칼날을 덮어 주우며) 소근개, 넌 달포 동안은 칼자루 잡지 말고 근신하고 있거라. 

황정:네...? 

늙은백정:(백태 낀 눈을 희번덕거리며) 부정 탄 칼을 함부로 잡거나 경거망동했다간 화를 면치 못할 것이야. 

황정:(어이없고) 백태 어르신, 제가 칼을 안 잡으면...

늙은백정:다른 놈이 잡으면 된다. 이 안에는 얼씬도 하지 마라. 

황정:(답답한데) ...


8. 도살장 밖 (아침)


황정, 풀이 죽어 나오는데 백정1,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같이 걷는다. 


백정1:어른신도 다 널 위해 그러시는 거니, 너무 서운해 마라. 

황정:(암담한) ...

백정1:그나저나 이제 당분간 어찌 입에 풀칠할 거냐?

황정:(걱정이 앞서는)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백정1, 무슨 소린가 싶어 의아하고 한편 걱정스러운데...

황정, 터덜터덜 걸음을 잇는다. F.O


INS) 관아 전경 (아침)


나졸E:열일곱이오! (곧이어 둔탁한 매타작 소리가 들리고) 

황정E:으윽! 


9. 관아 일각 (아침)


형틀에 묶여 집장사령에게 치도곤으로 매타작을 당하는 봉두난발의 황정. 

관속들이 지켜보고 있고, 나졸이 활처럼 생긴 산판의 나무조각을 옮기며 수를 센다. 


나졸:열여덟이오! (철썩!, 매가 부러지고) 

황정:(고통스런) 악! 

나졸:(매를 바꾸어 들고) 열아홉이오! (철썩!) 

황정:아! 


10. 관아 외삼문 밖 (아침)


힘겨운 황정, 한 손을 벽을 짚고 서 있는데, 엉덩이에 피가 배어 있다.


양반:(몸서리 쳐지고) 사람을 아주 잡았구나. 쯔쯧... 그래, 수고했다. (돈 꾸러미를 건네고) 

황정:(놀라고) 나리... 이게 뭡니까요? 

양반:뭐냐니. 매값 아니냐. (흠흠, 헛기침 하는데) 

황정:(울상이다) 나리... 한 대당 한 전씩이잖습니까요. 약조하신대로 주십시오. 이러시면 쇤네 약값도 안 떨어집니다요.

양반:(생각하더니 다섯 전을 더 꺼낸다) 옛다. 나도 더 이상은 없다.

황정:(아쉽지만) 고맙습니다요. (굽신거리고) 

양반:흠흠...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니, 재수 없으면 또 보자. (가면)

황정:언제든 찾아주십시오. 볼기짝 잘 간수하고 있겠습니다요. (하고 희미하게 웃는데)


11. 황정네 마당 (저녁)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약을 달이는 황정, 부채질하는데 눈이 맵고...

한켠에 약꾸러미와 약첩 하나가 펼쳐진 채 놓여있다.

방 안에서 황정모의 심상치 않은 기침 소리가 들린다. 


황정:(방문 쪽을 보며) 엄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12. 황정의 방 (저녁)


한글과 한문 서책으로 도배가 돼 있는 방 안, 한켠에 탕약이 담긴 약사발이 있고 

황정, 누워있는 초췌한 황정모를 일으켜 앉힌다. 


황정모:돈이 어서 나길래 어떻게 매일 약을 대니?

황정:(약사발을 들며)의원 나리 댁에 땔감 좀 해드렸어요. 드세요. 

황정모:(애잔히 보며) 에휴... 니 정성이면 나아도 벌써 다 나았어야 하는데... 

황정:이거 드시면 나으실 거예요. (약사발을 입가에 대주어 먹이는)


황정모, 끄덕이며 마시는데 갑자기 기침이 터진다. 입에서 탕약이 튀어나오고...


황정:(당황) 엄니... (약사발을 내려놓고) 

황정모:이... 이 귀한 약을... (옷이며 이불에 묻은 약을 빨아먹으려는)

황정:(황정모의 약 묻은 얼굴 등을 닦아주며) 괜찮아요. 또 있어요.

황정부E:(벼락같은 고함 소리로) 소근개, 너 안에 있냐? 


문이 벌컥 열리며 황정부, 들어와 가죽신이 든 광주리를 툭 내던지고...


황정부:(잡아 끌어내며) 너 이 놈 일루 나와!

황정:(질질 끌려 나가며) ...아, 아부지이...

황정모:(놀라서 문가로 기어가며) 왜 그래요, 소근개 아부지... 소근개야 무슨 일이냐? 응? (기침하고) 


13. 황정네 마당 (저녁) 


황정, 마당에 패대기쳐지고 황정부, 따라 나온다. 

황정, 고통의 신음을 토해내는데 황정부, 무식하게 때리기 시작한다.


황정부:너? 어디서 뭐하고 다니는 거야? 백태 어르신한테 근신하란 얘기 못 들었어? 

황정:(고통스런) 아아... 

황정부:(눈치를 챈 듯 엉덩이를 발로 툭 차면) ...

황정:(극심한 고통) 아...

황정부:(멱살 잡아 일으킨다) 누가 너보고 매품을 팔라고 그러더냐? 어?

황정모:(놀라고) 소... 소근개야.....

황정부:백태 어르신 아시면, 너한테 다시 칼 잡으랄 것 같아, 이 녀석아! 

황정모:(어느새 나와서 황정부를 잡고) 아이고 소근개 아버지... 다 내 잘못이에요. 내 병 낫구겠다고 저 놈이... (말을 못 잇고 황정에게) 아이구 어디 보자... 어?

황정:아니에요. 엄니, 괜찮아요. 

황정모:(엉덩이의 핏자국을 발견하곤) 아이고... 내가 죽어야지... 그런 것도 모르고... 넙죽넙죽 받아 처먹었으니... 내가 죽일 년이에요. 내가... (기침하고) 

황정부:(다소 누그러졌지만) 그러게 왜 칼날을 빠뜨려가지곤... 그리고 이 놈아! 그렇게 니 에미 병이 낫길 바란다면, 마음을 더 정갈히 하란 말이야. 그러지 않아도 내가 용한 무당 불러 병굿을 할려 했구만! 

황정:(힘겹게 일어나며, 답답한) 그런 미신으로 어떻게 병이 나아요? 

황정부:허, 이 놈 보게. 니가 또 무슨 이상한 서책을 보고 그러는지 모르지만... 그딴 데 홀리지 말고, 애비 말만 들으면 되는 거야! 그러니 조용히 집구석에 처박혀 있어! 

황정:싫어요! 그렇게는 못하겠어요! (밖으로 뛰쳐나가 버리고) 

황정부:(기가 막히고) 뭐, 뭐? 저 놈이 정말.. 보자보자 하니까. 


14. 집 근처 (저녁)


황정, 답답해서 걸어오는데 마주오던 푸줏간 주인과 마주친다. 


황정:어, 어르신...?

푸줏간:마침 잘 만났다. 너 보러 가던 참인데... 

황정:네? 


15. 마을 일각 (저녁) 


황정과 푸줏간 주인이 앉아있고... 

황정, 통증으로 쪼그리고 앉은 자세가 불편하다. 


푸줏간:사흘 후에 청계천 역관 나리 댁에 잔치가 열려서 말이야. 

황정:그런데요?

푸줏간:질 좋은 안심 스무 근만 구할 수 없을까?

황정:네? 그런 건 백태 어르신한테 말씀 드리면 되잖아요. 

푸줏간:나한테 갑자기 몰아줄 수 없다잖아. 그러니까 니가 좀 부탁 좀 해달라고. 니 말이면 잘 들으시잖아.

황정:지금 저... 근신 중이라... 

푸줏간:몸이 근신이지, 입도 근신하나? 

황정:(잠시 생각한 후) 네, 그럴게요. 말씀 드려볼게요.

푸줏간:고마워. 그리고 그 안심을 말이야. 딱 이 손 크기 만하게, 그리고 두께도 손두께 만하게 썰어줘. 

황정:뭘 해드시기에 그러는 건가요?

푸줏간:뭐라드라... 수, 수... 수택기? 그래, 수택기!

황정:수택기? 수택기가 뭔데요?

푸줏간:낸들 알아? 잔치를 서양식으로 한다는데, 서양음식이겠지. 내일 한성에 있는 외국 사람들은 죄다 오는 모양이야. 군인도 있고, 장사치도 있고, 양의도 있고...

황정:양의? 양의가 뭔데요?

푸줏간:서양 의술을 하는 자라지 아마. 왜놈인데 칼로 살을 째고 꿰매고 한다는 거 보면, 우리 하는 일하고 도진개진이지 뭐.

황정:사람 몸에 칼을 댄다구요?

푸줏간:그래. 근데 그게 다 죽어가는 사람도 살린다는구나.

황정:설마요...

푸줏간:내가 뭐 할 일이 없어서 농을 할까. 하여간 그 양의가 하도 용해서 말이야. 못 고치는 병이 없대.


솔깃한 황정, 얼굴에 결심이 떠오르고.... 


INS) 성균관 전경 (낮)


박사E:박학이독지(`博學而篤志)하며, 절문이근사(`切問而近思)하면, 인재기중의(`仁在其中矣)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