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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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별채 (아침)


땀이 흥건한 황정, 이불을 덮은 채 한 손을 허공을 헤집으며 신음을 토해내고 있다. 

어느 순간, 헉! 하고 깨어나 일어나는데, 고통을 느낀다. 


황정:(고통스런) 으...! 

석란:움직이지 마세요. 


황정, 누군가 보면... 뿌연 시야가 맑아지며 석란의 모습이 보이고...

그 옆으로 유희서, 막생이 있다. 


유희서:정신이 좀 드십니까?

황정:...여, 여긴...? 

유희서:강가에 쓰러져 계신 걸 보고... 제 여식이 모셔왔습니다. 유희서라 합니다. 

막생:즈희, 역관님이시구. 여긴 따님이세요. 

황정:...

석란:기억 안 나세요? 나루터에서... 

황정:(기억 못하는) ...

석란:...강가에 쓰러져 계셨어요. 총상을 입으셨구요. 

황정:(생각을 하는데) ... 


플래시 백) 황정, 배에서 뛰어내리다 정포교에게 총 맞는 장면이 떠오르고..


황정:(애써 외면하는) ...기억나지.. 않습니...다...(‘요’를 안하고) 

석란:(안타까운) 어쩜 좋아. 충격이 크신 모양이에요...

막생:온 몸이 만신창이가 됐는데 제 정신 박혀 있으면 그게 이상한 거죠.

석란:(째려보는데) ...

막생:(찔끔, 입 다물고) ...

황정:(갈증을 느끼는 듯) 저, 무... 물 좀... 


유희서, 황정의 베개를 들어 상체를 세워주고... 막생이 옆에 있는 물대접을 건네면...

유희서, 건네받아 황정의 입가에 대준다.

황정, 힘겹게 물을 마시는데... 


막생:(중얼거리듯) 총알구멍으로 물이 안 샐까 모르것네.

석란:막생! 

막생:안 샐 거예요. 잘 꿰맸으니께. 그려도 선비님은 우리 석란아씨 아니었음, 애저녁에 황천길에 가 계셨을 거구먼요. 에효, 새 가마 피범벅을 다 만들고... 

황정:(석란을 보며) ...고맙습니다. 

석란:(시선 부담스럽고) 아, 뭘요... 


문이 열리고, 알렌이 들어온다. 황정, 알렌을 보고 놀라는데...


유희서:(영어) 오셨습니까? 지금 막 깨어나셨어요.

알렌:(영어) 오, 그렇군요. 어디 좀 봅시다. (들어와 앉는)...

칠복E:나리, 손님 오셨습니다. 

유희서:그래...그럼, 황서생님...

황정:(놀라는) 네?

유희서:(쥐고있던 호패를 다시 보고는) 사시는 곳이 이천이신가 봅니다...(황정 손에 쥐어준다) 

황정:(호패를 물끄러미 보며) 아, 네...

유희서:그럼...(일어나고) 

황정:(몸을 일으키려는데 통증에 미간을 찌푸리고) ...

알렌:(영어) 움직이지 마시오. 

석란:움직이시면 안 돼요. 편히 누워 계세요. 


황정, 숨을 고르며 눕고... 

알렌, 이불을 걷으면 알몸의 황정이 드러나고...

석란, 고개를 돌리는데... 


17. 유희서의 집 일각 (아침) 


도양이 서있고... 유희서와 칠복이 다가온다. 


유희서:도련님, 오셨습니까? 

도양:예... 드릴 말이 있어 왔습니다. 

유희서:안으로 드시지요. (안내하면) ...

도양:(따라 나서는데) ...


18. 서재 (아침) 


유희서, 도양과 독대하고 있다. 


유희서:(놀라는).... 금 2000냥이나요?

도양:네. 

유희서:어째서 그런 많은 돈이 필요한 건지 용처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도양:...부끄러운 일입니다. 저희 숙부님께서 빚보증을 잘 못 서신 게 있어서요.

유희서:저런 쯔쯧... 보증은 부모자식 간에도 안서는 것인데... 오죽하면 퇴계 선생께서도 자식들에게 빚보증은 절대 서지마라 하셨을까요. 

도양:그러게 말입니다. 아버님 아시면 안 되는 일이라... 제가 조용히 해결하려고 나섰습니다. 숙부님 명의로 된 땅이 있는데 그걸 팔아 갚을 생각이니 좀 융통 좀 해주십시오. 

유희서:(곤란한 표정인데) ...현재 수중에 그만한 돈이 없습니다. 

도양:(실망하는) 이걸 어쩐다... 

유희서:언제까지 필요하십니까? 

도양: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유희서:알겠습니다. 한번 만들어 보겠습니다.

도양:유역관님만 믿겠습니다. 

유희서:참, 닥터 알렌이라고 미국 의원이 제 집에 묵고 있는데 만나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도양:미국 의원이요? 

유희서:네, 그렇습니다. 지금 별채에 총상 환자와 함께 있습니다. 

도양:총상 환자요?


19. 별채 (아침) 


알렌, 웃통을 벗은 황정의 상처를 소독하는 중이다. 방바닥엔 붕대가 풀어져있고.. 

황정, 자기 몸에 꿰매진 것을 보며 놀라는 표정이다. 


20. 별채 밖 (아침)


석란, 문 앞에 앉아서 통역 중이고 막생, 호기심에 안을 기웃거린다.


알렌E:(영어로) 아프지 않나요? 

석란:아프지 않냐고 하십니다. 


21. 별채 (아침)


황정, 알렌에게 고개를 숙이며 미소 짓는다. 


황정:...괘...괜찮습니다. 

석란:(E,영어) 아프지 않다고 합니다. 

알렌:(영어) 회복이 잘 되고 있어요.

석란E:잘 낫고 있으시답니다. 


알렌, 다행이라는 듯 미소 짓지만 황정, 어두운 얼굴이 되는데...


황정:(암담한) ...저...헌데... 치료비를 드릴 수 없는 처지라... 어찌해야 하는지 여쭤봐 주십시오.


22. 별채 밖 (아침)


석란:걱정 안하셔도 되요.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일에 돈을 받으실 분이 아닙니다. 

막생:저런... 무뢰배들이 선비님 돈두 다 훔쳐갔나부네... 쯧쯧. 


23. 별채 안 (아침)


황정, 놀란 눈으로 알렌을 바라보고 있고... 알렌 의아해 문 쪽을 바라보는데... 


석란:(E,영어) 환자분께서 치료비를 걱정하고 계셔서 잘 말씀드렸어요. 

알렌:(끄덕이고) ....

황정:(감동해서) 고, 고맙습니다. 하지만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알렌:(황정에게 미소 짓고) ....

석란E:참... 이따가 관아에서 사람들이 올 거예요.

황정:(흠칫 놀라) 네? ...관아라니요? 

석란E:아버지께서 신고를 해주셨어요. 어제도 사람들이 왔었는데, 선비님께서 안 깨어나셔서 그냥 돌아들 갔었어요.

황정:아... 예... (불안한 눈빛이 되고) ...


24. 별채 밖 (아침)


협문을 통해 유희서와 도양이 들어오면, 마루에 앉아있던 석란이 일어나 맞이한다. 


석란:도련님...

도양:(반가운) 석란아...

유희서:알렌 의원님은... 아직 안에 계시냐?

석란:네... 


알렌, 방에서 문을 열고 나오면 도양, 쳐다본다. 


유희서:(영어) 닥터 알렌, 수고하셨습니다. 

알렌:천만에요. (마루에서 내려오는데)


25. 별채 안 (아침)


초조한 황정, 힘겹게 몸을 움직여 창문에 난 문구멍 쪽으로 가고 있다. 


유희서:(E,영어) 소개할 분이 있습니다. 서양 의학에 관심이 많은 조선의 도령입니다. 

알렌:(E,영어) 반갑소. 호레이쇼 알렌이오. 

도양:(E,영어) 백도양입니다. 


황정, 문구멍으로 보면...

INS) 황정의 시점으로. 도양과 알렌이 악수를 하고 있고 그 옆에 있는 유희서. 

황정, 경악을 하고 주위를 둘러본다. 

이부자리 옆에 붕대와 가위가 보이고, 황정 기어가서 가위를 손에 쥐는데...


26. 별채 밖 (아침)


유희서, 석란, 도양 있고.... 


유희서:석란아, 넌 그만 가 보거라. 

석란:네, 그럼 도련님, 다음에 뵈요. (인사하고 가는데)

도양:그래. (아쉬운 듯 바라보고) ...

유희서:저는 알렌 의원 집 보러 가는데 같이 갈 참입니다. 

도양:그러십니까? 얘기 좀 더 나누려 했더니...

유희서:괜찮으시면 같이 가시죠.

도양:그럼, 그 전에 잠시 안에 있는 선비를 좀 봐도 될까요? 


27. 별채 안 (아침)


황정, 문에서 눈을 떼곤 생각하다가 가위를 손에 쥐고 이불 속에 들어간다. 


도양E:계시오?

황정:(돌아눕는) ...

도양E:흠흠... 안에 계시오? (문 열고 들어오는) 

황정:...누, 누구십니까?

도양:아, 실례하오... 총상을 입었다길래... 좀 보러왔소이다. 백도양이라 하오.

황정:(몸을 일으키고) 화... 황정이라 합니다. (가위를 몸 뒤로 감추는) 

도양:그나저나 어쩌다가 이런 변을 당한 거요? (얼굴을 보려는데)

황정:(고개 돌리며)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도양:변을 당해서 기억이 가물가물한 모양이오. (상처를 살피며) 좀 풀어서 봐도 되겠소. (하며 황정 허벅지에 감긴 붕대를 푸는데)


황정, 도양의 무방비 상태인 목을 본다. 손에 쥔 가위에 힘이 들어가고...


도양:(꿰맨 곳을 보며) 잘 꿰맸군. 참 신기하지 않소? 아마 양의학을 처음 겪어볼 것이오. 

황정:직접은 처음이고... 본 일은 있습니다. 

도양:그래요? 그래, 뭘 본 적 있소?

황정:(도양을 보며) 그러니까... 늑막천자하는 걸 본 적 있습니다.

도양:아... 그건 어떻게 하는 것이오? (고개를 들어보면)


황정과 도양의 시선이 마주치고...


도양:(못 알아본 듯) ...

황정:(도양을 보며) 고뿔로 고생했던 환자였는데...


플래시 백) 와타나베가 황정모에게 늑막천자하는 장면..


황정E:알고 보니 결핵성 늑막염이란 병이었습니다. 가슴에 관을 박아 노란 물을 빼내더군요. 

도양:결핵이었군. 이태 전에 독일에 코흐라는 자가 발견한 병원체요. 치명적이긴 한데... 잘 먹고 잘 쉬는 것만으로도 많이 좋아지는데... 가족이었소? 

황정:(눈가에 눈물 비치고) ...

도양:죽었나보군. 

황정:(원망하듯 바라보며) 임종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도양:이런... 

황정:(가위에 힘이 들어가며) 그리고... 시신해체를 본 적 있습니다. 

도양:(놀라는) 정말이오? 

황정:(끄덕이며 보는) ... 

도양:아, 그 결핵환자를 병원에서 했겠구려. 근데 그건 해체라 하지 않고 부검이라 하는 거요. 어쨌든 시신을 해체하는 일은 양의학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오. 장부에 대해 잘 알아야 정묘한 의술을 펼칠 수가 있는 법이오. 

황정:(빤히 보며) 그러면... 때때로 시신을 도체해 보기도 해야겠군요. 공부삼아... 

도양:(끄덕이며) 그렇소. 공부삼아... (하다 의아한) ...?

황정:왜 그러십니까? 제 말이 틀렸습니까?

도양:아, 아니오. 서양에선 양의원이 되려면, 시체 셋은 해체해 봐야한다고 하더이다. 

황정:(분노감에 부들부들 떨며) ...그렇군요.

도양:(갸웃거리며 보는) 혹시 당신....?

황정:(긴장하고) ...! (가위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도양:우리가 어디서 만난 적 있소? 

황정:아, 아닙니다. 초면입니다...

도양:낯이 익은데.... 아니, 아니... 그래 맞아! 

황정:(손에 든 가위가 미세하게 떨리고) 

도양:우리 세책점에서 만났잖소! 서학책들을 팔러 왔고... 

황정:아, 아... 그러고 보니... 기억나네요. 

도양:어쩐지... 양의학에 대해 잘 안다했소... 

칠복E:도련님! 나리께서 준비 다 되셨답니다. 

도양:그래, 곧 나간다고 아뢰어라. (황정에게) 실례가 많았소. 몸조리 잘하고... 담에 또 봅시다. 어쩐지 우리 잘 통할 것 같소. 

황정:....


황정, 나가는 도양을 보다 가위 든 손을 보고 불안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쉰다. 


28. 길 (오후)


유희서, 도양, 알렌, 걸어가고 있고... 


유희서:일면식이 있는 서생이었군요. 

도양:네, 양의학에 나름의 지식이 있는 친구였습니다. 

유희서:그렇군요. 쯔쯧... 그런 서생이 어쩌다가 그리 됐을까요?

도양:재수가 없었던 거겠죠. 잘 보살펴 주십시오. 

유희서:도양 도련님이 부탁하시는데... 정말 신경 좀 써야겠습니다. 하하...(걸음 멈춰서며, 영어) 아, 바로 이 집입니다. 


알렌, 유희서의 말에 고개를 들고 쳐다보면... 아담한 저택이 눈에 들어오고... 


29. 알렌의 집 (오후)


알렌,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기뻐 어쩔 줄을 모른다. 


알렌:(영어) 오, 조선의 집? 아름답습니다! 


알렌, 여기 저기 문을 열어보기도 하면서 구경중이고...

유희서와 도양, 알렌 쪽을 지켜보며 얘기를 나눈다. 


도양:근데 저 미국인은 조선엔 무슨 이유로 온 건가요? 

유희서:의료 선교를 하러 왔는데... 장차 조선에 병원과 의학당을 세울 큰 꿈을 지닌 분이지요.

도양:허면 먼저 전하를 뵙고 허가를 받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유희서:네, 하지만 알렌 의원은 외교관이 아니어서 말입니다. 사실, 입궐 조차도 어려운 형편입니다. 

도양:뜻은 좋으나 이뤄질 수 없단 얘기군요. 그거야 말로 기대만 앞선 한낱 헛꿈이네요. 

유희서:꼭 그렇게까지 말씀하실 것은....

도양:현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하는데) ....

알렌:(영어) 아주 맘에 듭니다. 당장 계약을 해야겠습니다! 


유희서, 미소로 화답하고... 도양, 그런 알렌을 불쌍한 듯 보는데...


INS) 유희서의 집 전경 (오후)


30. 별채 밖 (오후)


황정, 피로 얼룩진 옷을 입은 채 방에서 나와서 힘겹게 마당에 내려선다. 

황정, 조심스럽게 나가려는데, 칠복이 들어온다.


칠복:아니, 왜 나오십니까요? (부축하려 하고) 

황정:아 됐습... 됐네. 측간이 어딘가?

칠복:이 뒤로 돌아가야 합니다요. 제가 모시겠습니다요.

황정:괜찮아... 천천히 가면 되네... 

칠복:아니, 그래두....

황정:괜찮다니까! 어디 사내끼리 측간을 간단 말인가... (협문을 나가고) 

칠복:(찔끔, 입을 삐죽이며) 그럼, 다녀오십시오. (이상하고)


황정, 식은땀을 흘리며 협문을 빠져나간다. 


석란E:The sun shines bright in my old Kentucky home...